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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것이다. 존재할 것이다.

이문정(미술평론가, 연구소 리포에틱 대표)

예술 창조의 근본 조건은 모든 부분이 상호 지휘하고 삶이 주체를 일시적으로 제 어머니의 몸과 저를 노리는 시신의 몸에서 동시에 해방하듯이, 전부를 죽음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하는 살아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1)

우리는 정자로, 젖으로 육신으로, 피로, 죽음으로 자연에 속한다. 뇌로도 자연의 일부다. / 우리 안의 언어의 폭력성으로도 자연의 일부다.2)

끝없는 움직임과 멈춤, 서로를 붙잡는 침묵과 파동. 빛을 머금은 어둠, 어둠을 삼키는 빛. 잠시 숨을 멈출 수밖에 없는 고요한 묘지. 다시금 숨을 쉴 수밖에 없는 생명체. 삶을 먹는 죽음, 죽음을 먹는 생. 흩어지는 존재의 기록인 수직적 비석, 그러나 흐려지는 비문. 높은 곳을 향하던 존재는 아래로, 아래로 파묻힌다. 그리고 분해-해체되어 다시금 세계와 하나가 된다. 이 모두가 얼마나 계속되고 계속될지, 아니다. 이것을 이어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물음표만이 이어진다. 이 모두는 신재은의 <GAIA-피식의 서>(2025)가 남긴 첫인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인상이다. 숨의 길목이 닫히듯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지속되고, 의미의 생성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처음부터 감정의 고양은 없었다. 가라앉고 숨어듦으로써 발동하는,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논리적 범주를 넘어선 반응, 언어-논리가 무력화되는 순간이 지나면 침잠된 감정들을 추스르고 침묵 속에서 조심스레 기억-몸에 새겨진 언어들을 꺼내본다.

삶-생은 당연시되지만, 불가사의한 기적과 같은 일-찰나들이다. 모든 생명체에게 동등하게 부여되는 이 세상에 태어남, 살아감, 죽음 역시 신비로운 여정이다. 가장 개인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과학과 철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생과 사의 과정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을 숙고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 변수와 가능성이 서로 관계 맺는 세상에서 누구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예외가 결코 끼어들지 못하는 유일한 명제는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이다. 죽음은 그것이 언제 오는지, 죽음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죽은 후 생물학적인 분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명확히 알 수 없기에 ―어쩌면 육체가 사라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호기심을 불러오며 수많은 사고 실험을 불러왔다. 인간은 영혼-정신이 있어서 그대로 지속될 것인지, ―기억을 잃은 채 혹은 가진 채―다른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지,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것인지, 아니면 해체되어 명명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하는지, 죽음 이후의 상태를 상상한다. 그리고 죽음이 자신과 다른 존재들, 세계에 어떤 의미인지 숙고한다. 물론 인간은 한순간도 인간임을 온전히 벗어날 수 없기에 죽음의 문제도 나 혹은 인간이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다섯 작품으로 이뤄진 <GAIA-피식의 서>에서 신재은은 인간, 즉 생명체의 죽음 직후 벌어질 일들을 근거로 육체적이고 문명적인 죽음을 이미지와 글로 형상화한다. 여기에는 죽음에 잠식당하는 과정에 관한 과학적이고 학술적인 연구 결과가 축적된 과거와, 작가가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체험하고 사고 실험하는 지금의 상황인 현재,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한 죽음 다음에 일어날 상황에 대한 상상인 미래가 정교하게 뒤엉켜 있다. 작가는 죽음의 잠식과 이탈, 포식자와 피식자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들며 인간의 권위 의식과 망각, 허세, 편견, 무지를 깨뜨린다. 살아가고 죽는 모든 순간에 먹고 먹히는 과정이 있다. 이는 생물학적 생존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이 관계는 일방향적이지 않으며 절대적 포식자는 없다. 또한 순환성으로 단순화시켜 설명할 수 없다. 

<숭고하지 않은 아이>(2025)는 작가의 대변에서 채취한 장내미생물을 천배 확대 촬영한 영상과 영상 앞에 세워진 투명한 비석의 틈에 놓인 “나를 먹을 너에게 / 너의 집인 사람으로부터”라는 문구가 인쇄된 ―성체를 연상시키는―식용 종이로 구성되었다. 영상을 보여주는 스크린 뒤편에는 언젠가 사후 면역 시스템이 붕괴하면 “정해진 순서”대로 작가의 “장벽을 물고 삼킬” 장내 미생물에게 작가가 쓴 편지가 붙어 있다. 스스로가 최종 포식자라고 믿었던-믿고 싶었던 인간의 바람과 달리 절대적 강자는 없다.3)

‘먹고 먹힌다’는 표현은 죽음이 생에 가해지는 최대치의 폭력임을 부각한다. 따라서 죽음은 아득히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삶의 “한계 극한”, “삶의 내부로 침입해 있는 바깥”이자 “자기 안의 타자”이다. 또한 식물에서부터 동물, 인간에 이르는 모든 생명체는 어떤 식으로든 폭력을 행하며 살아남는다.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세계 속 존재들은 모두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다. 인간이 매일의 일상에서 먹게 되는 모든 음식은 애도 없이 오직 먹히기 위해 식탁 위에 올려진 동식물의 주검이다.4) 그리고 종국에는 인간도 먹힌다. “우리의 머리는 우주의 최대치가 아니다. 우리의 몸은 포유류 동물의 최대치가 아니다. 추정은 언어 너머에서 최상급은 무너진다고 고백한다.”5)

그러고 보니 움직이는 미생물이 영사되는, 표현성이 짙은 추상 회화 같기도 한 세로로 긴 스크린은 비석 같아 단어 그대로 생과 사가 공존하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시각화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인간은 그 자체로, 살아있을 때부터 생만큼 죽음을 품고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그렇듯 인간은 세계-환경에서 자원을 얻으며 자기 자신을 존속하고 증식할 수 있는 최소의 생명 단위이자 기원인 세포로 채워진다. 몸과 정신의 작용은 ―두 세포의 융합에서 생겨난―하나의 난세포에서 시작된 수십조의 세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그런데 매일 수백억 개의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태어남과 죽음의 계속성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6)

한편 <숭고하지 않은 아이>의 시작점인 작가의 배설물은 인간이 언젠가 죽을, 유한한 동물성 유기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것은 육체에 필요하지 않은 폐기물이자 먹음과 먹힘의 결과물이다. 다른 생명이 입안으로 들어와 삼켜지고, 소화 작용이 일어난 뒤에 몸 밖으로 나오는 대변은 생을 오염시키는-오염시킬 수 있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위협이다. 그러나 배설물은 삶이 “가까스로 힘겹게 죽음을 떠받치고 삶을 유지해 나가도록 하는 조건”, “삶의 조건의 한계이기도 하다.” 배설물은 그것을 배출한 생명체가 살아있으며, 먹이 연쇄와 같은 폭력적인 방식일지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이 오물들은 육체가 “한계 너머로 완전히 나가떨어져 시체가 될 때까지” 끝없이 만들어지고 세상에 떨어진다. 그리고 오물의 주인이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 자기 육체 안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면, 스스로가 한계에 완전히 점령된 돌이킬 수 없이 전락한 오물-장소가 될 것이다. 자신이 주체라 믿었던 존재는 자신이 주인공이라 여겼던 세상에서 밀려난다. 나의 것이라 명명되었던 세상은 붕괴된다.7) 그리고 잡아먹힌다. 죽음으로 끊어졌던 세상과의 관계는 ―비록 몸의 주인이 인지하지 못할지라도―어떤 식으로든 이어진다. 

인간은 그 어떤 존재보다 죽음 이후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본능적인 반응에 더해진 과학적이고 인문학적인 탐구의 축적을 통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해 왔다. 의학을 통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뿐만 아니라 예술과 같은 창작물로 시간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발산한다. 구체적으로 예술은 장례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행위들을 통해 죽은 이는 다시 태어난다. 이집트 미술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애도를 위한 일차적 재료였던 시체는 작품으로 간주 되었고, 최초의 화폭은 수의였다. 무덤을 향한 경의는 조형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고 묘소는 첫 번째 박물관과 같다.8)

스스로 굳건하게 직립한 금속 조각이자 의자이기도 한 <무표정의 이빨>(2025)은 등받이가 길어 ―역시―비석을 닮았다. 인간 행위의 많은 부분은 영원을 향하고 있다. <무표정의 이빨>의 좌석에는 “나는 오래오래 씹히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라는 글귀가 거꾸로 양각되어 있어 의자에 앉은 사람의 맨살에 <무표정의 자국>(2025)처럼 새겨진다. 좌우가 뒤집힌 글씨는 각인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사유를 뒤집는 효과도 있다. 거꾸로 본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규범만을 따르면 읽을 수 없는-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찾아질지도 모른다. 여하튼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흔적은 언어로, 이미지로 남는다. 작가의 생은 예술 작품에 담긴다. 이로써 얼마간의 시간이 유예된 듯 느껴진다. 하지만 몸에 새겨진 글씨는 사라진다. 비석의 글씨는 닳고 흐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오로지 죽음만이 지속되는 것인지 되돌아본다. 의자는 잠시 쉬어가는 휴식의 도구지만 차가운 금속에 살이 닿는 찰나에 비석 그리고 각인의 장치가 된다. 편안한 장소는 사멸을 끌어온다. 정지는 죽음과 가깝다. 안락함과 불안, 지지와 폭력이 동시에 발생하는 지점. 안식이자 위협. 결국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다. 결국 초월이든 저항의 의지이든 발현된 것이든 덧없는 일 같다. 

죽음은 예술의 시작에 영향을 끼쳤지만, 일시적 극복에 머문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다. 가장 절대적인 상실을 피할 수 없음은 허무와 우울의 정취를 가져온다. 죽음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잠식해 들어온다. 마치 이반 일리치(Ivan Ilyich)가 “보이지도 극복할 수도 없는 힘”에 의해 검은 자루에 쑤셔 넣어지는 것 같다고 느끼듯이 밀려 들어간다.9)

이에 신재은은 생을 유지하는 동안은 죽음에 먹히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자 자신을 잠식해 들어오는 죽음을 부드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 장례지도사가 되어 “정신적 피식”, “감정에 먹히는” 스스로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행위는 “감정의 표출”이 아닌 “되새김질”이다.10) 스물한 매의 기록물인 <무표정의 기록집>(2025)은 덤덤하고 건조한 만큼 감성적이다. 작가가 장례지도사 교육을 받고, 망자를 떠나보내는 예식의 과정에서 응시하는 죽은 이는 신재은과 같은 종의 존재이기에 애도의 마음은 인간 전체에 대한 것으로 확장된다. 물론 그 안에는 아직 맞닥뜨리지 않았지만, 언젠가 도래할 자기 자신의 죽음과 삶의 상실을 슬퍼하는 작가도 포함된다. 애도의 마음 켜켜이 우울의 정서가 스며든다. 장례지도사 활동에서 사용된 시신 트레이와 작가의 음성이 녹아든 진동 소리, 트레이 위에 누운 존재를 품는 흡음재―<삼키는 몸>(2025)―는 모두를 삼킨다. 오롯이 자신에 집중한 채 가라앉으며 감각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죽음은 고독과 손을 잡는다. 죽음은 오직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기에 모든 사람은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나만의 죽음을 홀로 맞는다. 죽음은 “사람이 우글대는 도시와 무수한 지인과 가족 한가운데서 절감하는 고독이었고, 바다 밑바닥이든 땅속이든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장 완전한 고독”이다.11) 그러나, 이제 고독은 안온함이 된다. 약간의 자포자기, 초탈, 낭만적 순응,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작가는 처음부터 합당한 언어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나의 예술적 시공간-묘지가 완성되었다. 어떤 수사로도 전할 수 없는 정조가 전달된다. 아름답고 슬프며, 두렵지만 침착한, 가라앉으면서도 내적인 승화가 일어나는 시공간이다. 결과적으로 <GAIA-피식의 서>가 담아내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죽음이라 명명하는 생물학적인―죽음 직후에서부터 시작되는 서사와, 생의 끝을 응시하는 예술적이고 실존적인 행위는 서로 상쇄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모순된 감정들을 결합하는” 힙소스(hypsos)를 불러낸다.12) 

1) 파스칼 키냐르, 『키냐르의 수사학』, 백선희(역), ㈜을유문화사, 2023, p. 144.

2) 파스칼 키냐르, 2023, p. 103.

3) 신재은, 「숭고하지 않은 기념비」, 2025, https://www.shinjaeeun.com/note, 2025년 12월 9일 최종 접속. ; 신재은, 「나를 먹을 자들을 만나기 위해」, 2025, https://www.shinjaeeun.com/2025-5, 2025년 12월 9일 최종 접속.

4)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문학동네, 2021, pp. 170-171, pp. 180-181

5) 파스칼 키냐르, 2023, p. 100.

6) 장 클로드 아메장, 다니엘 에르비에 레제, 에마뉘엘 이르시 외 4명,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김성희(역), ㈜알마, 2013, p. 24, p. 27.

7)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민원(역), 동문선, 2001, pp. 24-25.

8)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역), 시각과 언어, 1994, p. 22, p. 28.

9)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김연경(역), ㈜민음사, 2025, pp. 100-101.

10) 신재은, <무표정의 기록집> 작업 노트, 2025, https://www.shinjaeeun.com/2025-3, 2025년 12월 9일 최종 접속.

11) 레프 톨스토이, 2025, p. 92.

12) 파스칼 키냐르, 2023, p. 103.

위 글은 2025년 경기문화재단 경기예술지원 사업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충격과 호기심 사이에서 

최희승 (큐레이터)

 

충격 요법

탑처럼 높다랗게 쌓인 흙더미 아래 깔린 썩어가는 돼지의 사체를 본다. 스티로폼을 먹은 밀웜을 키우고 그 밀웜을 먹은 닭고기 소시지를 먹을 수 있는 형식으로 전시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은 파리 유충과 그것의 배설물을 비료로 삼은 벼를 기르기도 한다. 작가의 배설물에서 채취한 장내 미생물을 확대하여 기록한 영상을 상영하거나 영안실에서 시체를 담았던 금속 트레이를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오기도 한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신재은의 작업은 시각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크고 작은 심리적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다수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지 못하는 감각을 통해 작업 과정에서 파생되는 사회적인 개념 (동물과 동물 복지, 인간과 비인간, 돌봄, 음식물 쓰레기 이슈 등)과 드러나지 않은 작가의 개인적인 서사를 전달하는 것이 신재은 작업이 지닌 특징으로 보인다. 이때 전시장은 일종의 무대이자 과정을 드러내는 실험실, 관객에게 충격을 전달하고 작가가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실 같은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충격적인 감각을 만드는 작업은 인상에 남기 쉬우며 그것에 대한 호불호를 거의 바로, 단시간에 판단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구더기를 키우는 과정은 누군가에게 목적이 분명한 무미건조한 일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정관념이 작동하여 눈살이 곧바로 찌푸려지는 일이다. 이와 같이 첫인상에서 거부감을 일으키는 방식에 대하여 작가에 따르면 그는 여느 시각 예술 작가가 그러하듯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매체와 방식을 찾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이러한 소위 징그러운 소재를 선택하는 이유는 혐오 받고 버려지는 생명에 대한 관심에 의한 것이며 충격을 동반하지만 그것을 목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작업의 형식에서 만들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과 실제 메시지 간의 거리는 관객의 해석의 영역으로 남게 된다.  

 

신재은은 왜 자신의 작품을 조각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은 나의 몸_구멍 난 토르소>(2023)에서 밀웜이 갉아먹는 스티로폼의 원형은 입체 미술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구와 원뿔, 원기둥이었다. 신재은은 작업에서는 텍스트, 퍼포먼스, 동식물, 미생물, 냄새, 연기 등 다양한 재료와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조각이라는 형식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업 전반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조각은 작품과 관객이 동일한 물리적 시공간에 실재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작가노트에서 직접 밝히고 있듯이 몸체를 지니고 눈앞에 존재하는 매체의 속성이 작가에게는 관객과의 소통의 전제로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가 조각을 사용하는 방식을 살펴본다면 일부 작업에서 역할을 지닌 가구나 기물로써 등장하는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관객이 몸을 숙이고 들어가는 검은 철창이나 소시지가 든 은색 육면체의 냉동고, 식탁, 의자, 테이블, 선반의 형식과 같이 주로 미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기능하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전하고자 하는 개인의 많은 이야기를 다수의 타인과 시각적, 물리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는 통로로써 확장 시키기 위해 조각은 신재은의 작업에서 형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먹고 먹히는 순환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고민한 <피식의 서>(2025)에서 출발이 되는 것은 작가의 배설물에서 채취한 장내 미생물 (사후 인체 분해 미생물)이다. 그는 이 미생물의 움직임을 확대 촬영한 영상을 중심에 두고 시체 트레이, 세로로 좁고 긴 등받이를 지닌 의자, 작가가 작성한 미생물에게 보내는 편지, 텍스트 형압을 피부에 새긴 사진 등을 제작하였다. 삶과 죽음, 먹고 먹힘, 미생물과 인간, 섭취와 배설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에 대하여 가구를 닮은 조각 (트레이, 의자, 좌대)들은 인체의 형상이나 행위를 상상, 촉발하게 하는 요소로서 분명하게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죽음의 냄새와 먹는 행위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충격을 만들어내는 신재은 작업의 시각적, 심리적 요소와 물리적인 조각의 형식은 결국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가? 놀라움, 참혹함, 기이함 등 일시적으로 휘발되는 감각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면 그의 작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로 수렴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지만 작업 초반부터 현재까지 지니고 있는 죽음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접근법이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인간을 비롯한 동물, 곤충, 식물, 미생물이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은 그들의 생존의 방식과도 맞닿아 있는데, 예를 들어 <피식의 서>에서  ‘내’가 죽은 뒤 가장 먼저 ‘나’를 먹으며 분해할 장내 미생물은 ‘나’의 삶을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죽음이라는 다가올 현실이자 정의할 수 없는 감각을 삶의 과정 속에서 찾되  마치 감정이 없는 조각처럼 대하며 불편하거나 피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계속 불러옴으로써 중간적인 상태에 도달하려 한다. 무언가를 키우거나 죽이는 작업의 양면성은 이러한 삶과 죽음이 나란히 이어지고 있는 태생적인 속성과 궤를 같이 한다.

부수적으로 파생되는 것들을 걷어내고 본다면 마치 형압판으로 도장을 찍어서 만든 메시지처럼 신재은의 말은 명쾌하고 반복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그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먹는 행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돼지고지 햄버거와 소시지를 구워 먹고, 식용 색소와 종이로 만든 편지를 먹는 행위를 전시장에서 벌이는 것. 먹는다는 생물이 평생 반복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이자 입이라는 구멍에서 시작되어 몸을 통과하는 순환적 행위, 식-피식 관계의 먹이사슬, 죽어서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는 생의 필연에 대해 신재은은 실제로 먹고 삼키는 행위를 독려함으로써 말하려 한다. 다시 말해 그가 표현하고 있는 죽음의 이야기는 먹는다는 삶의 행위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며 매일의 식사처럼 거듭되는 무의식적인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과연 죽음과 먹는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작품의 이미지가 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일으키고,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을 연출한다고 해서 취향으로만 그의 작업을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 글은 2025년 제주 예술곶산양 레지던시 전문가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 Jae-eun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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