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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골짜기

권혁규 (뮤지엄헤드 책임큐레이터)

미술은 금기의 영역을 넘나드는 알리바이가 되곤 한다. 배설물과 썩은 음식, 절단된 신체와 피가 낭자한 전시장의 모습은 더 이상 놀랄만한 장면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움과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동의 불가능한 혐오로 다가올 상황은 새롭고 독특한 것, 예상치 못한 사고를 유발하기도 한다. 현대미술이 혐오와 역겨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기회를 거부하지 않는 이유이다. 오히려 미술은 ‘거부’를 거부하며 일반적으로 유보되고 회피되는 사고를 시각장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다. 관객은 더럽고 추악한, 섬뜩한 현대미술의 장면을 자의든 타의든 지속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신재은의 작업은 간단히 말해 혐오스럽다. <Rhythm>(2021)에서 작가는 정육사가 돼지를 발골하는 퍼포먼스 영상을 진료용 의자에 앉아 관람케 하고 <이상한 꿈>(2020)에서는 전시장 중앙에 돼지 피 250kg을 얇은 비닐에 담아 매달아 놓는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피 봉투는 시간이 지나며 부패하고 역한 냄새를 공간 가득 채운다. 또 <Cake>(2021)에서는 테이블에 돼지머리를 통째로 올려놓고 귀와 코를 포크와 나이프로 썰어 먹는다. 그렇게 외부 세계를 배제한, 멸균된 공간으로서의 화이트큐브는 야만스러운 도축과 피비린내 나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인간(작가와 관객)은 가해자이자 관람자로, 또 다른 폭력과 혐오의 가담자로서 작업에 연루된다. 

최근 테미예술창작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GAIA-소화계》(2023)도 크게 다르지 않다. 1층과 2층(혹은 1.5층)으로 나뉜 전시는 얼핏 이전 작업의 단순한 형식적 반복이나 확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시의 상황 내부로 진입할수록 이전 작업보다 더 큰, 누군가의 일상으로 전시되는 혐오와 불쾌함을 마주하게 된다. 먼저 1층. 소시지가 가득 채워진 붉은빛의 냉장고가 입구를 마주 보고 있다.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며 작가는 스티로폼을 섭취한 밀웜(갈색 거저리의 유충)을 요리해 관객들과 나눠먹는 상황을 연출하려 했다. 하지만 스티로폼을 섭취한 밀웜의 식품 안정성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닭을 통해 밀웜을 - 그러니까 (스티로폼을 먹은) 밀웜을 먹은 닭고기를 - 나눠먹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냉장고 옆쪽 벽에 전시된 한 장의 종이는 작업의 타임라인을 정확하게 기술한다. 2023년 6월 1일: 원뿔, 원기둥, 구 모양의 발포 폴리스티렌(흔히 말하는 스티로폼)을 조형 제작한다. 2023년 6월 5일: 20,000마리의 밀웜이 스티로폼을 섭취하기 시작한다. 2023년 6월 23일: 육계 ROSS 품종 종계 1년 3개월령 암탉 2마리, 수탉 1마리 사육을 시작하고 스티로폼을 섭취한 밀웜과 성충 급여를 시작한다. 그 외 산란계용 사료와 초이 면역 사료를 포함한 음식을 상시 제공한다. 2023년 8월 30일: 육계 3마리 도계한다. 2023녀 9월 9일: 작가가 사육한 육계 10%와 일반 국내산 닭고기 기계발골육 90%의 닭고기 소시지 제조한다.   

 

 

1층에 펼쳐진 <이것은 나의 몸>(2023)에서 신재은은 냉장고 옆에 서 위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닭고기 소시지를 구워 관객들에게 나눠준다. 소시지가 놓이는 테이블 옆쪽으로 닭의 배설물로 보이는 덩어리들이 마치 고대 유물이나 화석처럼 놓여있고 또 그 옆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가(실제는 밀웜의 분변) 미심쩍게 전시된다. 그 앞으로는 무언가를 쉬지 않고 분쇄하는 장면이 플레이되고 바닥 전체에는 마치 양계장처럼 흙이 깔려있다. 일종의 먹이사슬을 만들고 관객을 불러들이는 전시는 ‘먹는’ 행위 주변에 보다 복잡한 욕망과 (비)문화의 사슬을 얽혀놓는 듯하다. 관객은 소시지를 먹으며 그 고기의 생전 모습, 그러니까 닭의 먹이와 배설물을 관람하고 사후의 일부를 장악한다. 이러한 관람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담하고 동참하는 행위에 더 가깝다. 공중에 떠다니는 미세한(아마도 밀웜의 분변) 가루/입자가 전시장에서 들이 마시고 내뱉는 호흡 하나하나에 침투되고, 양계장 흙을 밟고 닭고기를 먹는 상황은 마주한 저 영상 속 분쇄기 위에 나뒹구는 것이 고기나 특정 물질이 아니라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한다. 이쯤 되면 한쪽에서 플레이되고 있는, 전시를 통해 배급되는 소시지의 안전성을 설명하는 소위 전문가들의 인터뷰 영상은, 또 세잔의 원뿔, 원기둥, 구 모양의 스티로폼을 밀웜에게 먹이로 주며 숭고한 미술과 인간의 욕망을 대치시킨다는 설정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족에 가까운 장치가 된다. 관객은 흔히 말하는 전시의 미감, 논리, 시선, 사유의 영역으로부터 내팽개쳐진 채 즉각적인 혐오와 모욕의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게 미술의 은유는 직접 맛보고 들이마시는, 고기의 일부가 되는 상황을 결코 압도하지 못한 채 혓바닥 밑 내장으로 발밑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이 상황은 명확한 동기와 존재 이유를 소거하며 더욱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 어떤 논리적 이유와 동기를 떠올리더라도 직접 경험한 불쾌함은 증폭될 뿐 상쇄되진 않는다. 작업을 가로지르는 이 불쾌함은 흔히 유추할 수 있는 폭력, 불평등, 소외, 인간 비하와 같은 문제로, 사회적 규범의 재평가로, 두려움, 불안, 욕망에 대해 탐구로 쉬이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든 가능성, 혹은 의혹들은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추악한 상상과 뒤섞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혼란 혹은 타락으로 확장된다. 다시 말해, 전시가 제안하는 불편한 경험은 그 어떤 해석의 촉매제도 제공받지 못한 채 또 다른 불온함으로 증폭된다. 

해석의 범주 안에서 확신할 것이 없는, 해석 자체를 혐오의 영역으로 재규정하는 듯한 작업은 2층으로 이어지며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작가는 작업실에서 노계 사육을 했다. 소시지를 위해 육고기로 도축되기 전까지 닭과 함께 생활한 것이다. 2층에 전시된 노계 사육의 경험은 1층에 전시된 ‘죽이기’, ‘섭취하기’와는 정반대의 ‘살리기’, ‘돌보기’ 행위를 중심으로 한다. 작가는 닭들에게 체리, 잭슨, 나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닭은 “반려동물과 가축 사이 어디쯤”이 되어 인간/작가와 함께 생활한다. 작가는 말한다. “닭 생의 최고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반려동물 용품들과 간식들을” 제공했고, “유튜브로 닭의 언어를 공부해 ‘행복하다'라는 의미의 소리를 흉내 내 닭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일상의 낙”이었다고. 또 “생일에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꽃등심과 망고, 체리를 사서 닭들과 나누어 먹었다”고. “꼬순내를 풍기던 체리, 잭슨, 나나는 먹을 수 있는 닭인가 없는 닭인가. 꼬순내: 동물의 피부에서 나는 특유의 고소하고 사랑스러운 냄새”1) 2층에는 일종의 아카이브 룸처럼 닭들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과 엽서, 짧은 노트/일기, 닭을 씻길 때 썼던 목욕용품, 다쳤을 때 만들어준 보조 장치, 약 봉투, 산책 갈 때 닭을 담았던 코스트 코 플라스틱 백 등이 전시된다. 작가가 기록한 노계 사육의 날들은 얼핏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이지만 의도와 달리, 어쩌면 의도한 대로 1층과의 강한 대비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기괴한, 충격적인 장면으로 다가온다. 1층의 불쾌함이 시간적 서사와 일상의 기억을 초월하며 2층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Cherry Nana Jackson>(2023), <마지막 오후>(2023)등에서 볼 수 있는 다소 과장된 억양의 기억과 기록은 우월감과 죄책감, 혹은 슬픔과 그리움과 같은 인간 감정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한다. 특히 닭들과 함께한 일상을 엽서로 만들고 짧은 글귀를 적어 붙인 <Cherry Nana Jackson>(2023)는 일종의 제품/상품(product)화된 상실/슬픔의 기억을, 고통의 소비에 적극 가담하는 이미지의 오랜 욕망을 떠올리게 한다. 2층에 전시된 체리, 나나, 잭슨의 사진과 영상을 보며 전쟁 수용소의 잔혹한 이미지와 포르노그래피를 떠올렸다면 과한 연상일까.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말처럼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고통의 이미지에 다양한 방법으로 공모해왔다. 그에 따르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죽이는 행위의 승화’이기도 하다. 1층의 ‘먹기’와 2층의 ‘기억하기’는 얼핏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는 듯하지만 범하고 수집하고 보관하는 인간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관객은 유난히 낮은 천장 밑 의자에 앉아 한 장 한 장의 사진을 넘기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 어울리는 잔인한 따뜻함, “부드러운 살인”의 질식 말이다.2)  

전시는 줄곧 침범하고 왜곡하고 착취하는 인간을 드러낸다. 누구나 먹는다. 하지만 그 먹는 행위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은, 특히 의도치 않은 상황으로 마주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전시가 드러내는 1층과 2층의 경험은 ‘먹기’와 ‘이미지’의 살육을 병치시킨다.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 개인의 내부와 외부, 대상과 주체가 분명한 경계 없이 뒤섞이는 상황에서 앞서 설명한 불편함은 보다 강하게 휘몰아친다. 어디까지 의도된 것이고 계획된 것이지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각기 다른 정서와 행위, 기억과 기록이 동일한 전시의 시공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가히 폭력적이라 할 수 있는 이 불쾌함의 제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전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게 될까. 혹은 전시의 제안을 또 다른 폭력이라 말하며 내부로의 진입을 거부할까. 먼저 우리는 잔혹함과 불쾌함의 이미지에 익숙해지는 아이러니를 우려해야 될지 모른다. 잔혹함에 공모하는 이미지는 현실감을 지우고 끔찍함만을 소비한다. 도처에 깔린 재난의 이미지가, 포르노그래피가 더 이상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해짐의 한편에는 무너짐이 존재한다. 결코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역겨움과 잔혹함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망가짐은 어떤 종류의 의지를 상실케 한다. 

신재은 개인전 《GAIA-소화계》(2023)를 가로지르는 불편함은 어떤 유의미한 침묵을 혹은 도발을 제시하고 있는가. 관객은 전시의 역겨움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전시에서 각기 다른, 얼핏 상반된 상황의 혐오는 여기 연루된 모든 이가 같은 지반 위에 자리하고 있음을 말한다. 전시에서 작가와 관람객을 포함한 인간 모두는 복잡한 욕망의 사슬로 엮여 혐오스러운 이미지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존재한다. 작가와 관객은 순간의 욕망과 불쾌함에서 벗어나 그 감정이 쉽게 소비되지 않도록, 납작한 이미지에 정박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시의 불편함을 다시금 마주하고 또 숙고하며 그것이 진부한 알리바이나 유흥거리가 되지 않도록, 단순한 창작자과 관람자를 넘어 개별 주체로서 전시의 불편함을 마주해야 한다. 여기서 전시에 참여한다는 혹은 경험한다는 건 작가는 물론 관객에게도 단순한 가담과 목격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권리를 일으키는 사건으로 작동한다. 불편함과 관련된 일들에 간섭하고 침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말이다. 그렇게 전시는 개입하지 않는 보기를 재고하며 강력한 능동적 혐오를 요청하는지 모른다. 

1)  해당 문단의 모든 인용은 작가노트(2023년)에서 발췌함.  

2) 해당 내용은 다음을 참고: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사진에 관하여 On Photography』(1977원작), 도서출판 이후, 2005

위 글은 2023년 대전테미예술창작센터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

오정은 (미술 비평)

​♺ 

“몸이 녹아내리네.”

훈제 연기가 발하는 거기서 고기를 먹는다. 계육으로 만든 소시지다. 허옇게 부풀어 익은 겉 안에 분 홍 살코기가 들어있다. 한 입 크기로 베어 물자 약간의 육즙이 터져 나온다. 그와 함께 입안에 머문 고깃덩어리를 양쪽 어금니로 옮겨 씹는다. 압축돼 뭉쳐졌던 탱탱한 식감이 느껴진다. 조미한 케첩 소스의 새콤한 맛도 목으로 함께 넘어간다. 익히 먹어온 가공육, 보통의 소시지 맛이다.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이 소시지는 평범하지 않다. 이것은 플라스틱을 먹은 곤충을 먹은 닭으로 만 든 거니까. 물론 일반 사료를 먹은 닭고기도 혼합돼 있다. 비율로 따지자면 평범하지 않은 전자 닭이 10%, 평범한 후자 닭이 87%. 참고로 여기에 정제염, 후추, 넛맥분말 같은 기타 첨가물도 들어간다.

 

플라스틱을 먹은 곤충을 먹은 닭을 인간이 먹어도 되느냐고? 된다. 2015년 스탠퍼드 대학 연구진은 밀웜(딱정벌레목 갈색거저리 애벌레)이 플라스틱을 먹고 소화해낸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밀웜이 먹은 것은 우리가 스티로폼으로 알고 있는 발포폴리스타이렌. 수백 년의 시간을 요할 만큼 자연 분해가 어려운 플라스틱의 한 종류다. 밀웜은 그를 양분으로 섭취하고 안전하게 배설하며 잘 성장했다. 과학계는 열광했다. 플라스틱을 생분해하는 밀웜의 효소를 활용하면 환경 문제에 관한 인류 숙원에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유의미한 발견은 국내외 환경공학 연구에 새로운 불쏘시개가 되었다. 플라스틱을 먹고 소화하는 생물의 장내 박테리아 기전을 찾고 상용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플라스틱을 먹은 밀웜을 먹은 닭으로 만든 소시지 먹기. 신재은 작가는 이를 관객과 함께 하는 참여형 퍼포먼스 작업으로 꾸렸다. 개인전 《GAIA-소화계》, <이것은 나의 몸>(2023)으로 이름 붙인 신작에서다. 검정 드레스를 입고 전시장에 등장한 작가는 모종의 의식처럼 숙연하게 순백의 앞치마를 두르고, 빨간 조명의 냉장 숙성고에서 꺼낸 소시지를 역시나 진지하게 불판에다 올려놓는다. 불판 앞 에는 음식의 성분표가 적혀있다. 작가가 사육한 닭 육 10%, 일반 닭 육 87%, 기타 첨가물, 간략하 지만 친절한 설명이다. 그녀가 직접 구워주는 소시지를 관람객이 본다. 아니, 보는 것을 넘어 취식한다. 먹느냐 마느냐, 소시지를 두고 하는 새삼스러운 선택의 기로 뒤에. 그 새삼스러움을 새삼스러워 하게 하는 작품의 성찰 뒤에.

 

이 새삼스러움은 얼마간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신재은이 관객과 음식을 나눠 먹고 그럼으로써 작품 이 완성에 이르는 광경은 소위 ‘착한 미술’의 도식을 답습한 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논쟁의 것을 내포 하기 때문이다. 암시된 내용이 파헤쳐 지지 않는다면 신재은의 작업은 무지와 위선의 표면적 단계에서 그저 잔존할 뿐이다. 신재은은 플라스틱과 밀웜, 그리고 닭이 먹이사슬로 얽혀있는 관계에 <이것은 나의 몸>이라는 제목을 붙여 인간 ‘나’의 유일 자아를 희석하고, 비인간종의 정체를 주체적 인식 선상에 끌어올렸다. 관객은 안전성이 입증된 방법으로 비록 단계를 경유했으나 플라스틱을 먹는다는 불안에 놓이는 한편, 육식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신재은은 거기서 중단하지 않는다. 소시지를 성심껏 구우며 관객과 같이 먹자 권하는 그녀는, 그 음식이 자신이 사육한 닭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면서 밀웜과 닭의 생전 사진까지 전시해두고 있다. 더욱 찜찜하고도 잔인한 것은, 붉은 생닭 살이 기계에 혼합돼 갈리는 영상이 옆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다는 거다. 밀웜 2만 마리가 먹고 남은 스티로폼과 밀웜이 스티로폼을 갉아먹는 타임랩스 영상도 상영된다. 밀웜의 입장에서 그들 시선 관점을 반영한 것인지, 현미경으로 스티로폼을 100배에서 2만 배 확대한 광학 사진 <식도를 넘어>도 진열해 두었다.

 

셰프가 주방과 다이닝룸 벽을 없애고 손님에게 조리 과정을 공개하는 경우는 있지만, 가축을 도살하는 전초 과정까지 보여주는 일은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폴 메카트니(Paul McCartney)가 한 다음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도축장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다.”

 

블랙유머라기에는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에 더해 육식주의의 잔인성을 의식하게 하는 이 연출을 두고 일부 대중은 기함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최선의 자기 웅변을 다한다. 이것은 리얼한 다큐멘터리요, 작가의 연구 프로세스를 나열한 개념미술의 아카이브에 분명하다. 환경문제에 진일보한 발견, 혁신의 박테리아와 그것의 현전을 과학적 근거를 들어 감각적으로 공유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말이다. 더욱이 신재은은 도계 체성분 및 식품안전성 분석, 양계 독성 검사를 받았고, 플라스틱 섭취 밀웜 요리사와 연구자의 자문도 받았다고 명시해두었다. 단, 그럼에도 관객은 이를 체화해내기가 예의 편하지 않다. 신재은도 그 지점을 알고 조장하는 것 같다. 

♺ 

 

소시지가 가열되는 조리대이자 스테인리스 재질 좌대의 한쪽에는 밀웜과 닭의 분변이 각각 수북하게 쌓여 있다. 스티로폼을 먹은 밀웜의 변과 밀웜을 먹은 닭의 배설물이다. 관객은 어쩔 수 없이 분변 냄새를 맡으며, 이 또한 ‘나의 몸’이라고 말하는 그들을 마주해야 한다. 혹자는 그들 냄새를 흡입하며 불쾌를 억누르고 소시지를 씹어 삼킨다. 청결과 불결을 등분하지 않은 그 좌대 위의 분변은 전시장 바닥에 뿌려진 부엽토와 질적으로 흡사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또 다른 영상 속 상영되는 폐(廢)스티 로폼의 분쇄 이미지에, 잘린 닭고기가 반죽되는 아까의 영상에도 상호 공명한다. 분해, 소화, 부패와 순환의 감각이 물질과 피물질을 오가며 서로 공존한다. 생존하고 생멸하는 존재의 현현이 그로테스크하게 버물어져 간다.

 

자연에 실증하는 이상한 역설의 증언. 인공과 자연의 기괴하면서도 신비한 공존. 관객 참여와 농간을 동시 구사하는 작가의 계략. 인간이 숨기려는 동시에 보유하는 죄의식의 가차 없는 공개, 살아있는 신체와 죽은 비체, 혹은 죽은 듯한 신체와 유동하는 비체의 혼합. 자명한 믿음과 그것으로 굳혀진 느슨한 감각에 혼란을 입히는 질문의 유발. 신재은은 전작에서도 이런 방법론으로 자기 작업의 서사와 미학을 풀어낸 바 있다. 대표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침묵의 탑 pink>(2018)에서 신재은은 다양한 장소에서 채집한 흙과 시멘트, 아스팔트를 높이 쌓아 지층 탑을 만들고, 당일 도축된 돼지 사체를 그곳 최하단부에 끼워 넣었다. 관객은 이들보다 높은 상단 위치에서 난간 아래 가축의 부패됨을 보았고, 작가가 오프닝 음식으로 준비한 돼지고기 패티 버거를 먹었다. 당시 지표에 스며들었을 염증 반응은 이듬해 <Black Fountain>(2019)에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검고 찐득한 액체를 통해 형상화 되었다. <시들지 않는 언덕>(2019)에서는 가죽을 벗긴 토끼를 레진으로 감싸 박제했는데, 진피를 대신한 미끈한 재료 속 내장의 썩어가는 진행이 투명하게 보이고 악취를 풍기는 것이었다. 250kg에 달하는 돼지피를 비닐 주머니에 담아 허공에 매달았던 설치작 <이상한 꿈>(2020)은 작가가 칼로 비닐을 터트림으로써 정점에 이르려던 것인데, 미술관의 반대로 완수되지 못한 작이다. 피를 뒤집어쓴 작가와 무너진 아성의 화이트큐브 공간을 볼 뻔했다. <Rhythm>(2021)은 수술복을 입은 정육사가 돼지를 칼로 발골하는 영상을 관람객이 진료용 의자에 누워 보게 한 것이다. 누운 관객이 과연 편했을까. 같은 해 <Cake>에서 작가는 삶은 돼지의 머리를 요염하게 잘라 무감하게 섭취하는 자기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열거한 이들 작업은 신재은의 <GAIA>연작(2018~)으로 엮어진다. 이는 지구를 유기적 생명체로 본 환경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의 가이아 이론에 영향 받은 작가가 구상한 일련의 신화로, 작업의 전체 배경을 뒷받침하는 텍스트 모음이다. 모계 대지에서 썩어 흘러나오는 검은 진액의 사체이자 유용 자원의 석유, 살처분된 가축을 연상시키는 구제역 트라우마의 기표, 같은 형제로서 하나된 기원을 공유하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 원초적 욕망이 노골화되고 관습과 금기가 깨지는 긴장, 그 균열 상태에서 발생하는 괴이함의 전조, 죄와 형벌의 시사 암시가 신재은이 만들어낸 그 이야기에 있다.

 

인류세 논의의 각축장인 동시대, 신재은은 인간 내부의 탐욕이 깃든 현상을 풍자하고 비판하지만 때 로는 그를 수행하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심판대에 오르기도 했었다. 그녀는 작업이 직설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혹은 대중이 꺼려하며 미술관에 피해를 입힌다는 이유로 전시나 언론 보도에서 거부된 전력이 몇 번이나 있다. 그래도 작가가 매 작품의 의도를 해명하고 모든 비난을 방어할 수는 없다. 자연에 관한 인류의 전횡에 대하여 작가 역시 뭐라고 책임을 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신재은의 작업은 위험한 테두리 안에 있고, 자기모순을 담지하고 있으며, 위악을 아닌 것처럼 하지도 않는다. 신재은은 죄의 공방을 나눠 갖고 그를 위한 각계의 질문을 유도한다. 안 보던 데를 관찰하고, 극성스럽게 증빙하며, 불쾌의 지점까지 파고든다. 가해를 재연하고 우리에게 있는 욕망의 민낯을 초연히 나타내 보임으로써 그렇다. 불순한 마녀의 역할을 즐기듯 도맡는다. 혐오스럽고 역한 데를 왔다 갔다 한다. 오염 난 데, 상처를 주입한다. 신재은의 유레카는 거기서 나온다. 

♺ 

“변수가 생겼다.”

신재은은 이번 전시를 설명하는 작가노트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전시장 1층의 작업과 대비하여 2층의 작업물은 이런 변수의 결과를 비교적 자전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원래, 스티로폼을 급여한 밀웜을 요리하여 전시 중 관객과 나눠 먹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식품 안전성을 상향하기 위해, 그 밀웜을 사료로 먹은 닭을 요리해 먹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우리가 식용으로 먹는 대부분의 닭은 로스품종의 것이다. 작가는 수소문 끝에 한 양계장의 도움을 받아 로스품종 닭 다섯 마리를 데려온다. 식용으로 쓰일 주기를 지나 도태를 앞둔 노계였는데, 이동 중 폐사한 두 마리를 제하고 세 마리를 작업실에서 10주간 키웠다. 200장의 사진과 메모 <Cherry Nana Jackson>(2023)은 체리, 나나, 잭슨으로 각기 이름 붙인 닭들과 작가 사이 교감한 추억을 기록하고 있다. 영상 <변수의 기록>(2023)은 실내 작업실 면적 대부분을 닭의 생활공간으로 내준 작가가 반려동물처럼 애틋하게 그들을 대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작업실에서 3개월간 키운 밀웜을 관찰 촬영한 <밀웜 20,000마리와 스티로폼>(2023)의 영상과 쌍을 이룬다. 그 밖에 각종 추억이 담긴 오브제와 도살 직전 오후에 그들 반려(?)닭을 촬영한 비디오가 전시 공간에 가변 설치되었다. “반신욕이 암탉에게 좋다고 하여 아픈 다리 찜질도 할 겸 자주 시켰다. 자스민 향이 나는 거품 가득한 욕조에 앉아 있으면 몸이 녹아내리네. 눈은 스르르 감기고.”

 

이 모든 것들은 변수에 의한 것이다. 신재은은 이전에도 종종 곤충이나 가축을 작품의 재료로 삼았지만, 그것은 생을 다한 것이었다. 그들은 바퀴벌레나 토끼, 돼지였지 체리, 나나, 잭슨같이 이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 마리의 닭, 아니 체리, 나나, 잭슨은 좁은 케이지에서 평생 한 번도 밖을 보지 못하 고 한 걸음 뛸 일도 없이 죽을 것이었으나, 신재은에 의해서 자기 이름을 얻고, 사료 외의 맛난 음식도 먹고, 스티로폼을 먹은 밀웜도 물론 먹고, 산책도 하고, 반신욕을 즐겼고, 체리와 나나의 경우 닭 다리 뼈가 부러져 동물병원에도 수차 다녔으며, 그러다 정해진 그날 안락사됐다. 이후 발골된 살이 일반 기계 발골육과 섞여 소시지가 되었고, 주인이었던 신재은의 조리에 의해 익혀져 식품이 되었다.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먹을 수 없는가.”

신재은이 작업을 계획하며 주제 삼았던 이 질문은 본래 플라스틱을 두고 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밀웜의 장내에 폴리스타이렌을 분해할 수 있는 박테리아를 갖고 있다면, 그 박테리아의 기전을 밝혀 다른 생물에 이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인간을 비롯한 여타 생물종에게서 새로운 소화균주를 더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연관된 물음을 확대하며 말이다. 그런데, 사육의 대상이 아니라 반려의 생물로서 닭의 등장은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난제 무게를 더 키워놓았다.

 

그리고 알다시피 결국, 신재은은 먹었다. 나를 포함한 여러 관객과 나눠 먹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GAIA-소화계》를 둘러싼 하나의 사슬구조를 완성했다. 어떤 쪽의 반발과 이의 제기의 가능성을 염 두에 두면서도, 그녀는 현대의 보편을 몸소 대변했다. 전작의 흐름과 연관해 본다면, 의외의 행동은 아니다. 그녀가 당하는 거부, 비판은 자기 작업이 어떤 금기와 모순과 맞닿아 있는지 확인하는 쾌재의 절차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이번 예측 밖 변수는 신재은이 지금까지 일관해온 태도를 조금은 타파하게 만든 것 같다. <Cherry Nana Jackson>의 사진 뒷장에 적힌 글귀는 거대 서사 <GAIA> 시리즈의 문장과는 확연히 다른, 개인의 소소한 어투로 쓰인 것이다. 사변에서 경험으로, 내면의 진솔로 더 치밀하게 소화해 들어온 정서 감각이다. 공격적인 반응, 불온의 지적을 각오할 만큼 그 역시 날 서고 난해했던 작가성이 작품의 실증에 분해돼 미립자로 더 세밀하게 스며들었다고 나는 추정한다. 그것은 작가의 다음 작업으로 이어질 것이며, 작가와 관객의 소화계를 한 바퀴 돌아 질문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플라스틱을 먹는 밀웜에게서 모종의 유연함을 생각해 본다. 인식 밖의 발견, 기성의 균열이었던 것이 거기 있다. 그리고 여기, 죽어 흩어지는 것과 그것을 먹고 살아가는 것, 고체로 농축돼 쌓이는 죽음의 질량과 그를 다시 분해해 생명으로 자정하는 숭고한 에너지를 감지한다. 이를 칭할 수식을 신재은의 작품 명제를 인용해 내뱉어 본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다.

 

 

비평문을 다 쓴 다음 작가에게 보내 어떠냐고 물었다. 마음에 든다는 답신이 회신되어 왔다. 안도한 나는 몇 가지 오탈자를 확인해 교정한 뒤 최종본으로 마무리한다. 신재은의 이번 작업은 참 발칙하고 흥미로웠다. 그녀와 함께 하며 나도 새로운 것을 먹고, 인상적인 경험을 했던 것 같다. 어떤 건 아직도 경험되는 중인 것 같고, 어떤 건 언어로 채 정제하지 못한 감각이었다. 괜히 쓰리기도 하다. 떠오르는 사념을 곱씹으며 이제 욕조에 물을 담아 반신욕을 준비한다. 자스민 향이 나는 거품을 물에 푼다. 후끈한 열기가 점점 번져 오른다. 몸이 녹아내리고 눈이 스르르 감기는 것을 느낀다.

1) 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가축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740억 마리 닭이 인류의 식량이 되었다.

2) 서술의 편의상 ‘평범함’으로 분류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을 만하다. 인류가 섭취하기 위해 규격화한 닭과 그렇지 않은 닭 중 무엇이 평범한 닭일까? 3) 어느 인터넷 유머 게시판에서는 ‘이곳이 K-스탠포드다’라며 2010년 한국의 한 맘카페에 올라온 글에 주목한다. 해당 글은 밀웜이 스 티로폼을 갉아먹고 있다는 민간의 증언을 담고 있다. 이는 스탠포드 대학의 학술 발표보다 5년 앞선 것이다.

4) 스티로폼은 밀웜 성장에 유익한 먹이가 되었다. 다만, 겨를 먹은 대조군에 비해 영양가 섭취 정도는 낮았다고 한다.

5) 신재은은 밀웜 2만 마리에게 급여하는 스티로폼을 원기둥, 원뿔, 구의 형태로 했다. 세잔(Cezanne)이 자연의 본질적 구조로 파악한 이들 세 개의 기하학적 조형은 전작 <Sink Sank Sunk>(2019)에서도 차용된 개념이며, 자연의 원형 이미지를 구사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6) 신재은은 이번 전시중 친환경 연구기업인 MCE 대표 박종욱, 리플라 CTO 김홍래, 밀웜 요리가이자 유성호텔 조리이사 최창업의 인 터뷰 영상을 상영한다.

7) <시들지 않는 언덕>(2019)은 신재은의 엄밀한 구분에 의하면 <GAIA>연작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 희생 이후의 사건이자 파열하여 흐르는 물성의 표현으로 작가가 탐닉했던 바에 연동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8) 필자는 이 시기 신재은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닭의 발톱에 할큄 당한 상처가 작가의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역력했다. 그래도 작 가는 체리, 나나, 잭슨을 좋아하며 품에 안았다. 체리, 나나, 잭슨도 자기를 안아달라고 성을 내는 듯했다.

9) <Cherry Nana Jackson>(2023)의 메모 일부.

10) 양계장의 사육 닭은 걸을 일이 없어 뼈가 약하다.

11) 보통의 식용 육계는 40일 전후를 살고 도축된다. 종계 노계였다가 신재은에 의해 10주간 더 사육된 체리, 나나, 잭슨은 약 1년 6개월 정도를 살았다.

12) 동물보호 단체나 채식주의자, 혹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반발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각오했다. 단일 가치로 쉽게 판별할 수는 없는 복잡한 이슈의 상황도. 

위 글은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인아카데미 지원 사업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 Jae-eun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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