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이냐 저것이냐1)
유은순(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십 년 전 한 요리 프로그램에서 애저가 나왔던 적이 있다. 애저란 자궁에서 사산된 새끼돼지를 말하는데, 모공에 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채로 어미 품에 그대로 안겨 있듯이 잠들듯 죽은 모습이었다.2) 같은 날, 돼지머리부터 꼬리까지 딱 절반으로 절단한 돼지도 나왔다. 출연진들은 저마다 귀한 식재료이며 신선함만을 강조할 뿐이었다. 2024년으로부터 불과 10년 전의 프로그램에서 돼지 사체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나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식재료로서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접할 때, 그것이 이전에 온전한 생명을 가진 존재였다는 점을 자주 간과한다. 자본주의는 생산과 소비를 이원화하고 생산 단계에서 분업을 가속화함으로써 효율성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유통과 가공을 통해 이윤을 창출한다. 이러한 분화 과정에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은 사라지고 섭식의 유희만이 소비자에게 남겨진다. 신재은은 이러한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삭제되는 과정을 《GAIA》 시리즈를 통해 복원함으로써 인간의 책임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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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신적 실존
2020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개최한 《GAIA Part 1: Inflammation》은 2019년에 제작한 <침묵의 탑 Pink>의 미니어처 버전 작업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인간에게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아직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 단지 해를 끼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 살아있는 돼지를 살처분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 후 인천아트플랫폼의 한 곳에 높다란 시멘트 기둥과 그 아래에 파묻힌 실제 돼지 사체를 설치하였다. 관객은 높다란 기둥의 최상단의 눈높이에서 돼지고기 패티 햄버거를 먹으며 그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저기 죽어있는 돼지와 같은 동물로 만들어진 살더미를 먹는다는 것은 새삼스럽고 괴이한 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한 <침묵의 탑 Pink>의 미니어처 버전에서 시작된 레드카펫은 전시장 입구를 가로질러 석유와 같은 검은 물이 솟아나는 <Black Fountain>(2019)으로 이어진다. 전시는 돼지는 묻어놓고, 돈이 되는 석유는 끝장을 볼 때까지 뽑아 올리는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작가는 《GAIA Prologue》(2018)에서부터 《GAIA Part 3: Twins》(2021)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관한 서문이나 작품설명글 외에, 성서를 패러디한 글을 도록에 썼다. 전지전능한 조물주로서의 ‘처녀’와, ‘돼지’와 ‘인간’이라는 쌍둥이에 대한 탄생 설화에서부터 인간과 처녀의 근친, 영악한 인간이 주도하여 만든 문명과 거기에 이용당하는 희생양으로서의 돼지에 관한 이야기가 때로는 잠언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설화는 인간이 처녀와 (거의 같은) 전능성을 가진 것처럼 환경과 지구의 존재를 파괴하고 제어하는 상황, 인간 중심적으로 생성된 위계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작가는 《GAIA Part 1: Inflammation》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을 담지한 ‘인간’이라는 보편적 존재로서 돼지로부터 석유로의 순환을 바깥에서 바라본다. 층층이 쌓인 분홍색의 잉크가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맑아지도록 설치한 작업 <The Pure>에서처럼 소비자로서 인간은 돼지고기든, 석유든 가장 ‘순수하게’ 정제된 상태로 마주한다. 이 작업에서 생명의 죽음 - 해체 - 가공 - 유통을 거쳐 상품화된 객체는 전능한(척하는) 인간의 역능 아래에 존재한다.
2. 심미적 실존
개인전 《GAIA Part 2: White》(2020)와 《GAIA Part 3: Twins》(2021)에서는 돼지의 발골과 해체 과정에서 발생하는 살과 혈, 장기에 주목하는데, 여기서 작가는 객체로서 돼지와 주체로서 인간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다. 이 작업에서 작가는 인간의 잔인함을 폭로함으로써 동정심을 자극하려 하지 않는다. 《GAIA Part 3: Twins》의 입구에 설치된 무영등처럼 그동안 자본주의 시스템이 은폐해 온 착취 시스템을 온전히 드러내고자 할 뿐, 이에 대한 가치판단을 유보한다.
작품에서 새하얀 공간과 돼지의 붉은 육체는 빈번하게 서로 대비된다. 도축장에서 도축 후 모은 250kg 피를 비닐에 담아 전시한 <이상한 꿈>(2020)은 전시장의 하얀 공간과 대비되며, 수술복을 입은 정육사가 돼지 한 마리를 발골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 <리듬>(2021) 또한 무균실 같은 하얀 방에서 촬영했다. 매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는 ‘인간’이라는 종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구역질 혹은 자기혐오를 넘어서 어떤 심미적 순간을 획득한다. 여기서 심미성은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획득되는 인간적인 쾌락이나 향락의 관점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을 사육하고 정복하고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은 지적, 능력적 우월성을 주장해 왔다. 인간은 좋음과 나쁨, 선과 악, 미와 추 등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좋음, 선, 미에 자신을 놓고, 나쁨, 악, 추에 동물을 놓아 왔다. 작가는 인간에게 유해하거나 혐오스럽다고 판단되는 것들을 집요하게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이분법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흔들고 이때까지 평가가 절하되었던 것들에 대한 가치판단을 다시 요청한다. 도축되기 10분 전의 돼지의 눈을 클로즈한 <어쩌면>(2021) 역시 응시의 타자로서만 존재했던 돼지가 응시의 주체로 전환되는 순간을 보여줌으로써 돼지와 인간의 위계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3. 윤리적 실존
개인전 《GAIA-소화계》(2023)와 《GAIA-비빔》(2024) 프로젝트에서는 미시세계와 거시세계, 인간과 비인간을 오가는 순환의 고리를 만드는 실험을 진행한다. 미세플라스틱-밀웜-닭-인간/음식쓰레기-동애등에-배설물-광합성박테리아-흰다리새우-인간/음식쓰레기-동애등에-배설물-거름-쌀-인간이라는 순환 구조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모든 단계에 세심하게 개입하면서 직접 이들을 돌보고 공존하며 일시적인 공동체를 만든다. 《GAIA-소화계》를 고안할 당시, 작가는 처음부터 닭을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미세플라스틱을 섭취한 밀웜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닭이라는 연결고리를 추가한다. 그리고 체리, 잭슨, 나나라고 이름 붙인 이 세 명(命)과 3개월을 동거동락하면서 처음에는 예상치 못한 다양한 상황과 마주한다. 종계의 역할을 다한 노계는 작가 덕분에 폐사의 운명을 피했으나, 결국에 이들은 죽을 예정이고 소세지가 될 것이다.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가 가득 찬 수조에 넣었던 데미안 허스트의 <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1991)이나, 빔 델보예가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던) 베이징에서 아트팜을 운영하며 돼지를 사육하고, 살아있는 돼지의 피부에 문신을 하고 자연사할 때까지 키웠던 것처럼 동물을 ‘전시’하는 일은 현대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되어 왔다. 말로는 거창하게 ‘삶의 부질없음’, ‘죽음의 필연성’이라는 그럴듯한 의도를 덧붙인다. 그러나 데미안 허스트는 타 존재를 지배하는 우월한 존재로서 전지적으로 죽음을 숭고하게 표현하기 위해 열등한 존재를 끌어들였고, 빔 델보예는 자연사할 때까지 사육을 했다고는 하지만 돼지와 정서적 교감을 이루는 양육은 아니었다.
만약 신재은이 단순히 충격이나 혐오감을 주기 위해서였다면 직접 닭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먹이사슬을 직접 보여주기 위하여 밀웜에게 플라스틱을 먹이고 이를 다시 노계에게 먹이를 주는 과정에 거짓이 없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하더라도, 계육이 만들어야 할 소세지의 전체 양에 비해 10% 밖에 나오지 않아 공장식으로 사육된 계육을 별도로 구해야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닭을 키울 필요는 없어 보인다. 작가는 약 3개월에 이르는 시간 동안 노계와 함께 살았다. 여기서 사육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작가는 자신이 기거하는 공간과 닭의 공간을 분리하지 않았고 키우는 기간 동안 체리, 잭슨, 나나의 삶에 자신의 모든 일정을 맞췄기 때문이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체리와 나나가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서 작가에게 안길 때마다 팔에 생채기를 남겼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들을 위한 여러 장치를 고안하며 최선을 다해 돌보았다. 산책을 시키고, 햇볕을 쬐고, 모래 목욕을 시키고, 몸에 좋은 음식을 챙겨주었다.
동물권 투쟁을 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에서 비인간의 희생에 반대하며 자연의 순환고리의 일부를 끊어내려기 위한 실천을 도모한다. 반면, 신재은은 기어코 인간을 순환의 고리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GAIA Part 1: Inflammation》와는 다르게 여기서 ‘인간’은 더이상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안전한 위치에서 사태를 목격하는 방관자 혹은 생사여탈권을 지닌 일방적인 가해자가 아니다. 순환고리 속에서 섭식의 윤리를 실천하는 양육자이자 생산자, 소비자이다. 그동안 자본주의가 은폐하고 끊임없이 분리해 온, 유희 이전의 치열한 획득의 과정을 복권시킴으로써 작가는 복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는 단순히 섭식의 문제를 떠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의이다. 인간은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실존적 한계를 가진다. 인간은 취사선택한다고 믿지만 불가분하게 순환의 고리 내부에 위치해 있다.
데미안 허스트, 빔 델보예와 같은 작가가 동물을 작품에 활용하는 방식과 다른 지점이다. 이들이 동물을 결국 작업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신재은은 인간까지도 순환에 포함시킴으로써 도구화라는 비판에서 벗어난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시점에서 인류가 구축한 시스템을 정교하게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누구나 옳다고 믿는 정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기를 권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실존적인 차원에서 질문을 던진다.
1) 글의 제목은 키르케고르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로부터 차용하였다. 이 책은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의 단계를 가상의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독자로 하여금 어떤 인생을 택할 것인지 질문한다. 신재은은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단계와 무관하나 신재은의 작업에서도 변별되는 실존적 단계를 발견할 수 있어 제목을 차용하였다.
2) 물론, 현재는 사산된 돼지가 불법이어서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죽은 새끼 돼지를 구해다가 썼다고 한다. 한 달 만에 자연사한 돼지일지, 죽임을 당한 돼지일지는 불확실하다.
위 글은 2024년 금천예술공장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