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전문: 사라지는 돼지, 그러자 드러나는 고기
김맑음 (큐레이터)
고기가 보인다. 그전까지 돼지의 형상이었던 것이 사라졌다. 흔히 도소매점 정육코너에서 보았던 기억으로 인해 이제는 부위별 명칭이 떠오른다. 의료용 의자에 앉아서 살짝 고개를 돌리자 돼지의 눈이 보인다. 하지만 이제 그 눈은 ‘고기’가 되어버린 바로 그 ‘돼지’의 눈으로 보이기 보다는 일반적인 ‘돼지’로 보인다. 차 스튜디오 2층에 설치된 영상 작업 〈리듬〉과 〈어쩌면〉은 그렇게 관람객에게 충돌하면서 다가온다.
입구: 돼지/고기
2018년부터 시작된 ‘GAIA’ 시리즈의 세 번째 전시는 ‘Twins’를 제목으로 삼는다. 인간과 돼지를 쌍둥이로 상정한다는 전제 조건으로 두고 전시를 관람하게 되면, 전시장 내부는 돼지의 이미지는 뚜렷히 보이지만 사람은 찾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된다. 아니 정확하게는 돼지의 이미지이기 보다는 고기의 이미지에 가깝다. 〈머리, 어깨, 무릎, 발〉에서 분쇄되어서 쏟아나오는 장면이, 〈Cake〉에서는 한국에서 전통적인 제의 과정에서 사용된 돼지 머리를 작가가 직접 먹고있다.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돼지는 보이지 않고, 고기만 보인다. 특히나 이 이미지들 속에서 사람을 찾으려고 하면 유일하게 발견되는 것은 〈Cake〉에서 등장하는 작가의 모습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이 ‘Twins’에서 거의 비어있는 인간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바로 관람객 자신이 된다.
바로 여기에서 충돌은 시작된다. 돼지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형제라고 생각해보지만 빈번히 고기의 이미지 앞에서 부딧히고, 분쇄되거나 도축되는 돼지를 보면서 그 고통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이 이미지에서 돼지의 고통은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 죄책감이 옅게 든다. 수잔 손택이 이미지 속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진 채 고통을 쳐다본다는 이유로 이미지를 비난해 왔다. … 그렇지만 (이미지를 통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그냥 보고 있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 것으로 진단하였다. 고통의 무게감을 따지기 전에 필요했던 것은 우리의 자각이었던 것이다. 돼지는 지속적으로 육식의 수단으로 본인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6개월 단위로 고기가 된다는 사실이 이 이미지에 담겨있고, 우리는 바로 이 이미지를 본다는 자각이다. 손택의 말을 이어보자면 “뒤로 물러선 채 사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옛 선인들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누군가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타인의 고통』, 서울: 도서출판 이후, 2004)라고 이야기한다. 일견 잔인해보일 수 있는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사색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출구: 남겨진 시나리오 뭉치
이 사색에 부쳐 신재은 작가는 하나의 시나리오를 전시장에 배치한다. 〈Cake〉의 이미지 앞에서 이 시나리오를 짚는 것은 마치 축하 케이터링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전의 ‘GAIA’ 시리즈와 달리 전시장에 아무런 냄새가 지각되지 않는다는 점은 이 시나리오의 무게를 좀 더 실어준다. 넘버링된 시나리오는 각자 다른 화자의 관점으로 쓰여져 있다. 돼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로또 1등과 관련된 인물들로 이어진다. 뉴스, 과학잡지, 소설, 신화, 역사 등 다방면의 리서치를 진행한 신재은 작가는 이를 토대로 하나의 내러티브로 구성한다. 이는 시나리오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 기반으로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리서치를 기반으로 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시나리오 형태를 취하면서 인간의 착각과 같은 맥락이 된다. 시나리오를 한 줄씩 대사로 읽는 장면은 이 전시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데, 이 전시의 모든 이미지는 돼지와 고기 사이를 왔다갔다하기 때문이다. 작품으로 구현되지 않은 시나리오는 그 자체가 작품을 취하면서 전시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내러티브를 더하는 동시에 이미지를 파고 관입하게 된다. 결국 이 시나리오는 하나의 출구가 된다. 고통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람객은 시나리오로 도피한다.
이 전시는 육식의 종말을, 동물의 권리를, 혹은 반대로 인간이 육식을 할 자유를, 인간의 권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이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위선적인 입장에서 돼지와 고기 사이를 오가는지 질문할 뿐이다. 문득 그렇다면, 시나리오에 돼지의 이야기를 프란츠 카프카의 한 주인공으로 덧붙여 본다.
그의 책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의 주인공 로트페터는 원숭이 ‘출신’이다. 그는 아프리카 야생 원숭이로 포획된 뒤 스스로 훈련을 통해서 인간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학술원에 짧은 보고를 올린다. 이 로트페터 이야기의 한 부분을 옮겨 ‘돼지’의 말을 대변해 본다. 그리고 그렇게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된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면, 사람들은 자유라는 말로 곧잘 스스로를 속이고 착각합니다.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이듯, 자유에 상응하는 착각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의 하나입니다. … 그렇습니다. 제가 바란 것은 자유가 아니고 오직 하나, 출구였습니다. … 설령 그 출구가 착각이라 해도 그만입니다.”
위 글은 2021년 인천형예술인-유망예술인 다년형 2차년도 지원 사업을 통해 작성된 개인전 서문 입니다.
가이아의 신탁
배우리 (월간미술 기자)
외과의사가 된 ‘포정’의 <리듬>에 따라 뽀얀 ‘살갗’의 돼지가 부위별 붉은 ‘살코기’로 다 해체 되고 나면, 진료용 의자에 반쯤 누워 영상을 보고 있던 관객이 검은 화면에 비친 자신을 보게 된다. 돼지의 시선(<Twins>)까지 느껴지면 이 관객도 여지없이 자신의 <머리, 어깨, 무릎, 발> 이 갈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과 95%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돼지를 쌍둥이로 규 정한 이 전시는 마치 인간-가축 간의 어떤 위계가 상정된 것처럼 보 이게 하는 체제를 아예 곤 죽으로 만들어버린다. 다시금 음식물 분쇄 처리기에 곱게 갈린 ‘곤죽’(머리, 어깨, 무릎, 발)은 다시 돼지 사료와 섞이거나, 혹은 작가에 의해 언젠가 소시지로 만들어져 인간 관객의 입으 로 들어갈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라는 게 품요의 상징이잖아요. 이풍요로움이 다시 풍요의 산물 배속으로 들어가서 다시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 다음 작업이 될 것 같아 요.” 살처분된 돼지가 석유가 된 것이 아닐까 상 상하게 하는 <Black fountain>(2019)만 보더라 도, 인간이 ‘정치적 올바름’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제한적이다. 엄격한 채식주의자도 ‘이 제품은 대두, 밀, 우유, 토마토,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를 사용한 제품과 같은 제조시설 에서 제조하고 있습니다.’라는 주의가 붙은 것까지 거부하는건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든 문 명의 굴레를 벗어날수는 없으니 돼지에 대한 인간의 죄는 거의 원죄다. 하지만 말했듯이 작 가에게 ‘가축’과 ‘인간’, 돼지와 인간이라는 종 사이는 누가 누구를 보호하고 지킬 수 있는 관 계가 애초부터 아니었다. 개보다 똑똑한 종을 그렇게 부리면서도 ‘죄’라고 볼 수 없는건 인간 도 그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유기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 기 때문이다. 개미만 해도 진딧물 가축처럼 키운다는 사실은 작가가 다가가는 ‘진짜’ 세계를 들러내는 일부분이다. 신재은은 ‘프롤로그-Inflammation-White-Twins’f로 이어지는 <가이아 시리즈>를 통해 도덕과 이성으로 무장한 문명의 외피를 돼지의 내장과 피가 썩으면서 내는 악취로 녹이는 중이다. 동물복지단체에서는 ‘잔인한 것 아니냐, 저 돼지를 재료로 쓰지 말고 옥자 구해내듯이 살려 야 되는 것 아니냐’라고 한다고. 작가는 언제나 되물을 수밖에 없다. “전지구적 관점으로 보 면 인간도 그냥 자연 아닌가요?” 심할 경우 어린이 관객이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도 내 세우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품, <침묵의 탑 pink> 앞에서 아이들이 부패하는 돼지를 보며 놀라 워하지도 않고 그들끼리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다. 작가가 만든 섬세한 동선 에 따라 돼지 가 눌린 탑을 보기 전 그들이 보았을 햄버거 <Cutting a Burger>는 거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일상이라는 것을. ‘진짜’ 세계에 대한 작가의 중간 결론은 인간은 ‘가루’라는 것. 가루들이 다시 뭉쳐져서 말랑 말랑한 덩어리가 되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시 가루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것. 돼지와 내가 한 몸이 될 수 있는 결정적 이유라고 나 할까. 하지만 돼지의 척추를 세우고 내장을 파헤치는 이 작업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인간의 욕구를 그대로 승인하 면서도 간단하게 덮어버리는 사회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작가는 일부 동물만의 ‘편애’를 꼬집기도 한다. 언젠가 작가는 유기견의 사 체를 레진으로 고정시켜 리본을 달아주고 예쁘게 목줄을 달아 전시를 하고 싶다고 한다. 잔 인한 것은 작가의 조형인가, 현실인가. 그녀가 보기에 현재 유행하는 미술은 너무나 산뜻하 다. 우리가 먹다 남긴 돼지고기를 먹은 돼지로 만든 소시지를 먹을 운명이다. 물론 그런 끔찍한 운명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눈을 찌르게 되어있다. 돼지머리를 잘라 오물오물 씹는 신재은 은 신탁을 알려주는 예언자인가, 아니 면 돼지 자신이런가. 나는 지금까지 돼지의 이야기도 들었으며 예언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위 글은 2022년 월간미술 5월호에 개제되었습니다.